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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지역의 명운보다 자기정치가 먼저인가

공공기관 유치에 나선 민간단체, 귀빈석을 채운 지역정치

 

도시는 늙어가고 있다. 청년은 떠나고 아이 울음은 줄었으며 빈 점포는 늘고 학교는 학생을 걱정한다. 한때 14만 명을 넘었던 제천 인구는 이제 12만 명 선마저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지역의 시계는 다급하게 돌아가는데 정치하는 방식은 오래된 사진처럼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선거 때마다 새로운 제천을 약속한다. 지역 발전과 국가기관 유치를 외치고 중앙정치에서 쌓은 힘을 지역을 위해 쓰겠다고 말한다. 선거가 끝나면 유명 정치인을 부르고 나란히 앉아 악수하며 사진을 찍는다. 행사가 끝나고 손님이 돌아간 뒤 제천에 무엇이 남았는지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도시는 늙어가는데 정치만 장수한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 개막식에도 전국적으로 알려진 정치인이 등장했다. 영화제가 공식적으로 초대한 인사는 아니었고, 그는 자신의 SNS를 통해 지역구 국회의원의 초청으로 제천을 찾았다고 밝혔다. 정치인이 지역축제를 찾은 것 자체를 문제 삼을 일은 아니다. 영화제를 알리고 관광객 한 명이라도 더 불러온다면 지역에도 도움이 된다.

 

문제는 도시가 처한 시간과 정치가 보여준 장면 사이의 간격이다. 지금 제천에는 유명 정치인의 방문보다 더 절박한 일이 있다. 정부가 추진하는 제2차 공공기관 지방 이전이다. 전국 지자체가 기관 하나를 가져오기 위해 정부와 국회, 해당 공공기관의 문턱을 드나드는 가운데 충북 안에서도 혁신도시와 비혁신도시 사이의 경쟁이 시작됐다.

 

제천이 이번에도 구호만 외치다 빈손으로 남는다면 다음 기회가 언제 올지 알 수 없다. 공공기관 이전은 일자리 몇 개를 늘리는 사업에 그치지 않는다. 직원과 가족이 지역에 정착하고 주택과 교육, 소비와 세수를 수십 년 동안 지탱하는 도시 생존의 문제다. 인구감소의 속도를 조금이라도 늦춰야 하는 제천에는 놓치기 어려운 기회다.

 

제천은 오랫동안 철도도시였다. 중앙선과 충북선, 태백선이 만나는 철도망과 제천조차장, 차량정비 기반을 갖추고 있어 코레일로지스나 코레일관광개발 같은 철도 관련 기관을 요구할 근거가 충분하다. 문화·관광과 한방천연물, 공공의료 분야에서도 내세울 명분이 있다. 필요한 것은 기관 이름을 길게 나열하는 일이 아니라 한두 곳을 정해 실제로 가져오는 정치력이다.

 

시민단체가 메우는 정치의 빈자리

 

그런데 이 절박한 유치전의 앞줄에서 더 자주 보이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제천시 공공기관유치 범시민추진위원회다. 법안을 발의할 권한도, 정부를 상대로 공식 협상할 지위도 없는 민간단체 관계자들이 충북도청을 찾아 제천의 현실을 설명하고 북부권에 공공기관을 배치해 달라고 호소했다. 철도망과 정주 환경, 한방천연물산업을 내세워 제천에 기관이 와야 할 이유도 직접 알렸다.

 

시민들이 생업을 뒤로하고 지역의 몫을 요구하러 다니는 것이다. 범시민추진위원회의 활동은 고맙고 필요한 일이지만 마냥 박수만 치기에는 마음 한편이 씁쓸하다. 공공기관 이전계획을 바꾸고 정부부처와 해당 기관, 충북도를 설득하는 일은 중앙정치의 통로와 권한을 가진 지역 정치권이 앞장서야 할 영역이기 때문이다.

 

공개된 장면만 놓고 보면 역할이 뒤바뀐 듯하다. 시민단체는 서류를 들고 도청의 문을 두드리는데 정치인은 유명 인사를 지역축제에 초청했다. 시민들은 제천의 공공기관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발품을 파는데 정치권은 행사장의 귀빈석을 채웠다. 지역을 대표해 중앙정부와 담판해야 할 사람의 역할을 공식 권한도 없는 시민들이 대신 짊어진 모양새다.

 

시민단체가 정치권을 돕는 것과 시민단체가 정치권의 빈자리를 메우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전자는 건강한 민관 협력이지만 후자는 정치의 부재를 드러낸다. 범시민추진위원회가 열심히 움직일수록 시민의 열정은 빛나지만, 동시에 지역 정치권의 빈자리도 선명해진다. 시민의 헌신이 정치권의 부족한 성과를 가려주는 장식이 돼서는 안 된다.

 

그 모습을 기특하다고만 해야 하는가. 민간단체가 나서야만 움직이는 지역정치라면 박수보다 탄식이 먼저 나와야 한다. 아무런 공식 권한도 없는 시민들이 제천의 명운을 짊어지고 도청과 관계기관을 찾아다니는 동안 정작 권한을 가진 정치권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주문은 받았지만 메뉴는 나오지 않았다

 

물론 지역구 의원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공공기관을 기존 혁신도시뿐 아니라 제천과 같은 비혁신도시에도 배치할 수 있도록 관련 법률 개정안을 발의했다. 선거에서는 제천·단양의 산업 특성과 연계한 철도 공공기관 유치도 약속했다. 법안 발의와 공약은 분명 필요한 출발이었다.

 

그러나 시민은 출발한다는 말을 듣기 위해 정치인을 뽑은 것이 아니다. 목적지까지 데려다 달라고 권한을 맡겼다. 법안을 냈다는 말과 관계기관에 건의했다는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느 기관을 목표로 누구를 만났으며 무엇을 약속받았는지 구체적인 과정과 결과가 시민에게 보여야 한다.

 

선거는 시민이 정치인에게 주문하는 시간이다. 제천 시민은 선거 때 펼쳐진 메뉴판을 보고 철도 공공기관을 주문했다. 지역경제를 살릴 국가기관과 청년이 떠나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일자리도 주문했다. 정치권은 반드시 가져오겠다며 주문을 받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우리가 지역구 국회의원에게 주문한 메뉴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주방에서 무엇을 준비하는지도 선명하지 않다. 코레일로지스를 목표로 하는지, 코레일관광개발을 추진하는지, 보훈병원이나 한방천연물 관련 국가기관을 원하는지 시민이 알 수 있는 구체적인 전략이 보이지 않는다. 기관 이름만 여러 개 올려놓은 메뉴판으로는 아무것도 맛볼 수 없다. 한 곳이라도 선택해 정부와 충북도, 해당 기관과 노동조합을 설득해야 한다.

 

오히려 손님인 시민들이 직접 앞치마를 두르고 재료를 찾는 형국이다. 범시민추진위원회가 기관을 발굴하고 제천의 당위성을 알리며 충북도에 지원을 호소한다. 주문한 손님이 음식을 먹기는커녕 주방으로 들어가 직접 불을 지펴야 한다면 정작 주방장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런 상황에서 시민이 주문한 음식은 나오지 않는 식탁에 새로운 정치적 손님부터 초대됐다. 시민은 빈 접시를 바라보는데 정치인은 손님과 나란히 앉아 사진을 찍었다.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는 설명만으로 기다림이 해소되지는 않는다. 음식이 몇 년째 나오지 않는데 계속 “곧 준비된다”고 말한다면 손님은 주방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공약은 주문서이지 완성된 음식이 아니다. 법안을 발의했다는 말, 관계기관에 건의했다는 말,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을 주구장창 반복한다고 시민의 배가 채워지는 것도 아니다. 시민이 주문한 것은 발의와 건의가 아니라 제천에 실제로 들어올 기관과 일자리다. 정치는 말로 메뉴판을 채우는 일이 아니라 결과를 시민의 식탁에 올리는 일이다.

 

자기 정치 할 때가 아니라 기관을 가져와야 한다

 

지역구 의원에게 중앙정치의 인맥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전국적으로 영향력 있는 정치인과 관계를 쌓는 것도 지역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친분으로 제천에 무엇을 가져왔는지 보여주면 된다. 영화제 방문 자리에서 제천의 공공기관 유치를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했다면 그 내용부터 시민에게 공개하면 된다.

 

정치적 친분이 제천의 이익으로 돌아왔다면 비판할 이유도 없다. 중앙정부와 정치권을 설득하는 데 힘을 보태겠다는 약속을 받았거나 철도기관 이전과 국가예산 확보에 도움이 될 논의가 있었다면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지역에 남은 성과 없이 만남과 사진만 부각됐다면 시민이 그 장면을 곱게만 바라보기는 어렵다.

 

지역축제가 정치적 친분을 드러내고 자신의 존재감을 키우는 무대로 비친다면, 지역의 밥상보다 자기정치의 상차림에 골몰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그것이 실제 의도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사람의 마음속까지 확인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는 속마음이 아니라 시민에게 보인 행동과 지역에 남긴 결과로 평가받는다.

 

시민은 누구와 식사했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다. 시민이 주문한 메뉴를 언제 내놓을 것인지 묻고 있다. 중앙정치에서 쌓은 관계가 지역을 위해 사용되지 않는다면 그 관계는 시민에게 아무런 맛도 영양도 없는 사진 한 장일 뿐이다. 유명 정치인과 함께 웃은 사진이 빈 점포의 불을 켜주거나 줄어드는 학생을 되돌려놓을 수는 없다.

 

자기정치는 정치인 한 사람에게 다음 자리를 위한 투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소멸의 경계에 선 지역에는 정치인의 때를 기다려줄 여유가 없다. 도시는 살려달라고 하는데 정치는 자신을 알리려 하고, 시민은 먹고살 길을 묻는데 정치는 누구와 가까운지를 보여준다. 지역은 내일을 걱정하는데 정치인은 다음 선거와 다음 자리를 바라본다는 의심을 자초한다.

 

지역구는 정치인의 이름을 키워주는 간판이 아니다. 선거 때 주문을 받은 뒤 중앙정치로 돌아가기 위한 임시 영업장도 아니다. 정치인의 자리는 높아지는데 지역의 형편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그 성장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지역구 의원에게 맡겨진 힘은 자신의 정치적 미래보다 지역의 미래를 먼저 밝히는 데 사용돼야 한다.

 

제천 시민에게 필요한 정치인은 귀빈석의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이 아니다. 정부청사의 불편한 의자에 오래 앉아 제천의 몫을 받아오는 사람이다. 축제에 유명 인사를 초청하는 전화보다 공공기관장에게 거는 전화가 먼저이고, 정치적 동료와 나란히 선 사진보다 이전 협약서에 서명받는 장면이 먼저여야 한다.

 

정치는 결국 가져오는 일이다. 예산을 가져오고 기관을 가져오며 사람과 기회를 가져와야 한다. 뚜렷한 성과 없이 낡은 정치만 반복하고 자기정치에 골몰하는 모습은 단순히 보기 싫은 장면으로 끝나지 않는다. 정치인은 다음 선거에서 다시 기회를 구할 수 있지만 소멸의 문턱을 넘은 도시는 다음 선거까지 기다리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역의 명운 앞에서 벌어지는 비극이다. 영화제의 조명이 꺼지면 초청받은 정치인은 떠나고 함께 찍은 사진만 기록으로 남는다. 시민은 여전히 빈 식탁에 앉아 있고 약속했던 공공기관과 새로운 일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식탁 위에는 선거 때 펼쳐놓았던 메뉴판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더 서글픈 것은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이 정치인이 아니라 시민들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주문한 메뉴는 도대체 언제 나오는가. 그리고 그 메뉴를 만들어야 할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