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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풀이 발상지’ 안동 제비원 미륵불‥연미사

안동시의 또 다른 명소, 새로운 환경조성
인자한 조각상 석양 향해 미소 짓는 듯
자연석에 조각, 미인형, 예술적 극치 보존

 

옛날 영남에서 충청도나 경기도 서울로 갈 때는 안동을 거처 소백산맥을 넘어야 했는데, 그 길목에 있던 곳이 바로 제비원이다. 이곳은 제비원, 연구사, 연미사, 이천동 석불상, 제비원 미륵불 등으로 불리고 있으며, ‘성주풀이의 본향’ ‘소나무의 본향’이라는 안동의 유구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제비원은 세 가지 역사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옛날 민심(民心)의 수집과 전달 기능 역할을 수행했던 곳이라는 점과 둘째, 주변 지명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성주풀이의 본향’ 이자 ‘소나무의 본향’이며, 셋째, 이러한 유서 깊은 역사의 터전에 새로운 환경을 조성해 나감으로 다른 제비원의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시대는 미확인 되고 있으나 이곳은 여관(당시 원)이었다. 안동에는 이곳 제비원을 비롯해 서후 명리 두솔원과 안기동 비사원 등 부(府)내 19개소의 원(객사)이 있어 당시 민심 수습과 전달 및 공유 장소로 활용되었던 곳이다.

 

제비원은 연(燕)이라는 처녀와 제비가 된 목수 욱바우골 와공과 제비원 미륵불 목을 벤 명나라 장수 이여송, 제비원 미륵불 머리 부분을 지금부터 350여 년 전 조선 시대에 다시 올려놓은 것, ‘제비원 미륵불을 조각한 형제’ 등에 얽힌 야사도 전해지고 있다.

 

 

안동이 ‘성주 신앙의 본향,’‘소나무의 본향’ 이라 하는 것은 안동대 임재해 교수(저)의 ‘안동문화와 성주 신앙’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평양, 해주, 서울, 목포, 광양, 울진 등 전국 각 지역의 성주풀이 노래에 “성주의 본향 어디 메냐, 경상도 안동 땅의 제비원이 본 일 러라 제비원의 솔씨 받아…”등의 구절에서 성주풀이의 본향임을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안동시민의 노래에 나올 만큼 안동의 상징과 신앙의 대상이 되어 정신문화의 한 기둥이 되어있는 곳이다.

 

또 하나 확인해주는 것은 제비원 가까이에 이송천, 솔밤, 솔티, 송현, 송천, 솔뫼 등 솔 송(松)을 중심으로 한 지명이 많아 솔의 본고장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안동시는 송림의 애절함을 느끼며 그 근본을 찾고 갖춰나가기 위해 2009년 6월 울진 금강송 11그루, 2009년 11월 옥동 육송 2그루, 2009년 12월 예안면 정산리 150년생 소나무 3그루, 2010년 3월 옥동 육송 2그루, 2010년 5월 옥동에 있던 육송 12그루를 옮겨 심는 등 이천동 석불상 주변 정비사업을 통해 ‘소나무의 본향’이란 뜻을 담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와 관련 역사의 발원지를 2006년부터 사업비 25억 5000만 원을 투자, 유교 문화권 종합 개발 사업으로 2008년 11월 준공, ‘한국정신 문화의 수도 안동’ 의 역사터전으로 가꾸어 나가고 있다. 제비원, 연미사는 634년(신라 선덕왕 3년) 명덕이 창건했다. 명덕은 고구려 승려 보덕의 제자 중 한 명으로 바위에 불상을 새겨 모시고 연구사로 칭하기도 했다.

 

그 뒤 불상을 덮은 지붕이 제비와 비슷해 연자루 라 했고, 승려가 거주하는 요사가 제비 꼬리에 해당한다 해서 연미사, 법당이 제비부리에 해당한다고 해서 연구사라 불렀다. 연마사는 ‘이천동 석불’로 유명한데 안동의 상징적인 얼굴로 관광객들은 대부분‘제비원 미륵불’이라 부르는 사례가 많다.

 

자연암벽에 신체를 선으로 세기고 머리는 따로 올려놓은 전체높이 12.38m 거구의 불상으로 1963년 문화재 보물로 지정됐고 얼굴 모습의 인상이나 옷 주름 등으로 보아 11세기 무렵 제작된 불상으로 추정된다. 특히 조각상이지만, 언제나 엷은 미소 짓는 얼굴은 매우 인자하고 엄숙해 보이는 것이 이천동 석불상의 특징이다.